잊고 싶지 않아서, 더 열심히 기록한
남아공 사파리 @ 크루거 국립공원
~ 잠자는 사자의 콧털은 건드리지말라! (下) ~
야생의 땅 위로 해가 지고, 한낮의 더위 속에 느릿느릿 낮잠을 자던 사파리는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켠다. 야행성 동물들의 밤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 두 번 진행되는 사파리 중, 가장 스릴이 넘치는 것은 단연코 나이트 사파리. 좁은 시야 속에서 언제 무엇이 튀어나올지몰라 한껏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먼지처럼 보이는 동물들의 자취를 매서운 눈으로 쫓는 트랙커를 따라 사파리의 밤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사파리 체험을 하는 동안 가장 놀라웠던 것은 역시 트랙커. 타고난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것인지, 훈련의 성과인지, 어두컴컴한 가운데 풀잎 뒤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카멜레온 마저 찾아내는 날카로운 시력의 소유자였다. 내 눈에는 사람 발자국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동자 바퀴자국처럼 보이기도 하는 애매모호한 흔적을 '이건 레오파드, 이건 사자' 하면서 분별해내는 능력은 가히 놀랄 수 밖에!
항상 장총을 소지하는 레인져와 매의 눈을 가진 트랙커의 동행은 사파리를 더욱 안전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크루거 국립공원에서는 개인이 자동차를 가지고 스스로 사파리 드라이브를 체험할 수도 있지만, 비용을 더 들여서라도 트랙커, 레인져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하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더 많은 동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은 물론, 혹시 모를 안전사고에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는 아침부터 배부른 표범, 코끼리 가족, 얼룩말 무리, 코뿔소의 아침 산책, 기린 가족, 낮잠자는 암사자 무리 등 꼭 보고 싶었던 빅 파이브를 비롯, 굵직한 동물들을 많이 만났다. 마지막으로 숫사자를 꼭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사자의 흔적을 쫓아 석양을 등지고 달리던 우리. '만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얼굴이 아닌데 ... 오늘의 운이 마지막까지 따라줄까?
무전기가 소란스럽다. 몇 번 카피를 주고받더니 갑자기 속도를 내는 레인져. "숫사자 보고 싶다고 하셨죠? 곧 보실 수 있을겁니다!"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는 레인져의 말을 듣는 순간, 모두 기대에 찬 얼굴이. :) 역시 이번 여행은 운이 따라주는 것 같다.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지다니! 비록 해가 져서 사진 찍기엔 영 좋은 조건이 아니었지만, 사진보다 내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그래서 정말 바라고 바라던 '라이온킹'을 만났을까?
늠름하게 갈기를 휘날리며 왕의 위엄을 뽐내는 숫사자를?
그렇긴 한데 ...
사실 이 사진을 공개할까말까 굉장히 고민했다. (...) 동물의 왕 사자가 '쩍벌남'으로 등극하는 순간 ... 우스꽝스런 포즈로 숙면중이신 사자왕님. 이제 일어나셔야 할 시간 아닌가요? (...) 아니 어떻게 이런 포즈로 자는거지? 민망하면서도 얼마나 웃었는지! 프라이버시를 위해 공개를 망설였으나 과감히 폭로! 그야말로 지못미(=지켜주지못해 미안해) 사자가 아닐 수 없다! (푸핫;)
우리가 만난 숫사자는 두마리. 워낙 멀리 떨어져 주무시는 바람에 한 컷에 잡진 못했지만 아마도 부자관계가 아니었을까. 보통 하나의 사자무리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숫사자는 한마리 뿐이지만, 무리에서 태어나 3년 미만인 어린 숫사자는 독립하기 전까지 같이 지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다시 말해, 우리가 만난 숫사자들은 왕과 왕자인셈.
자동차 소리가 영 거슬리는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누가 감히 사자왕과 사자왕자의 단잠을 방해한단 말인가? (^^)
숨소리인지 코고는 소리인지 거칠게 내쉬는 소리가 들리고 ... 왕의 위엄은 저 멀리 내팽개치고 체통없이 주무시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면서, 우습기도(...) 했다. 저 두툼한 앞발에 한 대 맞으면 뼈도 못 추리겠지만 잠든 얼굴 만큼은 온순하다못해 천진난만하기까지 하니 ... (^^)
친근한 포즈로 주무시며 다가가는 서민정책을 몸소 실현하고 계신 사자왕님의 콧구멍을 클로즈업! 이 역시 위엄따윈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 이렇게 점점 날이 어두워지고 이제는 사진을 찍을 광량도 부족한 상태라, 잠에서 깨어나 본연의 늠름함을 보여주기만을 노심초사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런 나의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 드디어 잠에서 깬 사자 왕자! 윤기가 반들반들한 코, 동안인 얼굴을 보니 아직 어린 숫놈임에 틀림없었다! 몰려든 파파라치에 당황한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사자 왕자.
그에 비해 나사빠진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자왕님 ... 통촉하시옵소서! (^^;) 볼품없는 표정이지만 날카로운 이빨만큼은 위협적이다! 어둠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이빨을 보니 그제야 '백수의 왕 사자'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활동을 시작하는 것일까? 자리를 잡고 앉더니 고양이처럼 앞발 세수를 시작하는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인 숫사자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며 직접 사냥에 가담하진 않는다. 영역을 침범하는 다른 무리의 숫사자와 다투거나, 영역을 넓히는 등의 역할을 하는 것. 평소엔 수많은 암컷을 거느리면서 갖다바치는 음식에 숟가락만 얹는다고 생각하니 게으르고 괘씸해보이지만 ...
사자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는 순간, 좌중 침묵. 하품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마치 포효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크엉!"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위엄 없다며 놀렸던 내 경망스러운 입을 자책하고 싶었달까. 과연, 사자는 사자로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반듯해진 사자의 얼굴을 마주하니 또 다시 마음이 숙연해진다. 생각나는 단어는 딱 두개. 위엄과 기품. 천진난만하여 우습기까지 하던 자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동물의 왕 사자, 라이언킹이 그곳에 있었다! 이 야생을 지배하는 자, 사파리의 군주, 사자의 모습이 말이다. :) 잠자는 사자의 콧털은 건드려선 안되는 것이 분명하다.
염원하던 사자왕 알현까지 무사히 마치고, 가슴 가득 행복의 숨을 들이쉬며 다시 롯지로 돌아오던 길. 사파리에서의 3일, 그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다. 이 먼지바람과 투명한 하늘과 풀냄새와 하다못해 동물 똥냄새까지 그리워지는 순간이 분명 오리라. 그리 생각하니 가슴이 찡해서- 조금만 천천히 가자고, 레인져에게 말하고 싶었던.
나의 사파리는 이렇게 끝났다. 내 마음의 한 조각을 영원히 빼앗긴 크루거 국립공원에서의 행복했던 시간들.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며, 이별은 고하지 않았다. 사랑할, 사랑하고 또 사랑할 사파리에서의 추억들. 다소 집요했던 나의 이 기록이, 누군가의 마음 속에 남아공에 대한 씨앗을 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
[글/사진] 로지나 : 캐논 sx40hs
'Travel > 남아프리카공화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아공 여행] 찬란한 대자연! 파노라마 루트를 달리다. (22) | 2012.04.30 |
---|---|
[남아공 여행] 아프리카, 길 위에서 만난 일상 풍경 (16) | 2012.04.27 |
아기사자의 낮잠! 잠자는 사자의 콧털은 건드리지말라! (上) - 남아공 크루거 국립공원 (25) | 2012.04.19 |
가슴에 새길 아프리카의 풍경, 사파리에서! @크루거 국립공원 (24) | 2012.04.16 |
아프리카의 아침, 카리스마 표범을 만나다! - 남아공 크루거 국립공원 (43) | 2012.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