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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일본

대마도 여행,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느릿느릿 업데이트 되는 대마도 여행기도 이제 막바지가 보이네요!
대마도를 여행하는 이유와 대마도의 매력이 조금이나마 전달되었을지 모르겠어요. :)
바쁜 도시에서의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한 어촌 마을을 찾은 것 같은 여유로움,
울창한 자연에 기대어 느릿느릿 에코투어를 즐길 수 있는 천혜의 환경,
멧돼지 고기처럼 한국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미식 요리까지 만나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지요.

그렇다면 대마도를 찾는 또 다른 이유.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그것은,
바로 대마도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과, 우리나라와 얽힌 이야기들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실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러나 독도 문제로 시끄러운 요즘, 민감한 시기인만큼 함부로 이야길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졌어요.
특히나 회사 이름을 걸고 다녀온 출장인 만큼 제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을 풀어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고요.
물론 블로그는 제 개인적인 공간(정말!)이고, 오직 순수하게 제 의지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번 대마도 여행이 제 개인적인 여행은 아니었으니까요. (^^;)

그래서 제가 대마도에서 느꼈던 것, 배웠던 것들은 저만의 이야기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궁금하시다면 대마도로 떠나세요! (^^) 각자 나름의 감상을 가지고 돌아오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대마도 여행,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로지나







# 1. 한일교류의 가교, 대마도





-  백제 왕인박사 현창비


대마도에 남아있는 한일교류의 흔적, 시간을 거슬러 그 첫번째를 꼽는다면 '백제국 왕인박사'일 것입니다.
백제 근초고왕 시대 (추정 346-375년) 의 지식이였던 왕인은 천자문과과 논어를 전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고,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 시모노세키를 통해 (현재의) 규슈지역에 도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하여 왕인박사는 일왕 '우지노와 키이라츠코' 태자의 스승이 되었는데요,
한 나라 태자의 스승이었던 왕인의 공을 기리기 위한 현창비가 이 곳 대마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

이처럼 비행기가 없던 과거, 일본으로 향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대마도'는 가교 역할을 하는 중요한 땅이었습니다.
물론 대마도가 한국 땅이냐, 일본 땅이냐에 대한 논란은 잠시 접어두고 어디까지나 문물 전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말이에요. (^^;)








- 원통사(엔쓰지)와 이예 선생 공적비


일본과의 교류를 고려, 조선시대에도 계속됩니다. 그 흔적을 만나볼 수 있는 원통사와 이예 선생 공적비에요.
원통사는 고려시대의 '약사여래불상' 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는데, 이 약사여래불상은 우리나라에서도 귀한 불상이라고 하네요.
(* 본존불이라 함은 그 절의 가장 메인이 되는 부처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예 선생은 1373년 (고려 공민왕 22년) 에서 1445년 (세종 27년) 에 이르는 기간동안
대마도와 오키나와 등을 40여 차례 왕복하며 최초의 대마도 경차관 역할을 수행하셨습니다.
'통신사 이예 선생 공적비'는 학성 이씨 문중에서 직접 세운 비석이라고 하네요. :)







- 원통사에 남아있는 고려 법종







 # 2. 일제강점기의 아픔, 대마도





- 덕혜옹주봉축비 (사진출처:돈돌마미님 http://blog.naver.com/tls1977)


덕혜옹주 이야기를 아시나요?
책으로 더욱 화제가 된 조선 마지막 황녀의 비극적인 이야기 '덕혜옹주'의 흔적을 대마도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덕혜옹주와 강제로 혼인한 남자가 바로 대마도 도주의 후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덕혜옹주 역시 인사차 대마도를 방문하였는데,
당시 대마도에 살고 있던 동포들이 덕혜옹주의 대마도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것이 바로 저 봉축비에요.
(카메라 배터리가 나가는 바람에 제가 직접 찍은 사진이 없어 저희 회사 서버에 있는 사진을 빌려와서 쓰네요 허허;)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채로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 덕혜옹주의 흔적을 대마도에서 만나니, 더욱 씁쓸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 외에도 애국지사 최익현 선생의 항일구국운동 흔적도 대마도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전라북도에서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 수감된 최익현 선생은 단식 끝에 대마도에서 눈을 감으셨어요.
그 시신이 안치되어있었던 수덕사와 함께 최익현 선생 순국비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또 그와 대조되는 비석 역시 대마도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완용의 친필 비명이 그것이지요.
한일합병에 앞장 서, '매국노'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완용의 흔적까지 찾아볼 수 있었던 대마도.
이처럼 산재한 역사적 흔적들을 돌아보는 역사탐방을 위해 대마도를 찾는 분들도 많았어요.







# 3. 전쟁의 기억, 대마도





- 풍 포대적 (토요 포대적) 豊 砲臺跡


대마도에 남아있는 태평양 전쟁의 흔적. 토요 포대는 미국의 중재로 인해 사용되진 못하였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대륙을 향해, 똑똑히 캐논포를 겨누고 있던 흔적의 일부입니다.

1905년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시작된 세계 2차대전.
치열한 전투의 중심지였던 대한해협을 사수하기 위한 일본의 전투적 거점지였던 대마도.
당시 포대 숫자는 12곳. 우리나라 부산을 날려버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진 포탄을 설치했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대마도에서 조차 잊혀져버린 전쟁의 흔적이지만, 우리나라가 발굴하여 지금은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워낙 외진 곳에 위치하여 찾아가기는 쉽지 않지만, 냉기가 훅 끼쳐오는 어두컴컴한 굴 속에 흘러간 세월이 박제된 듯
전쟁의 흔적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사실에 괜스레 기분이 숙연해지곤 했어요.







- 만관교 (만제키바시 万關橋)


새빨간 원색이 인상적이었던 만관교. 만제키바시라고 불리는 이 다리가 왜 전쟁의 흔적일지, 저 역시 궁금했었어요.
이 다리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요, 바로 일본 본토 군함 진출이 용이하도록 항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운하를 건설했고,
그 운하 사이에 놓인 것이 바로 이 만관교라고 하네요. 이 아래를 통하여 전진한 해군이 도노자키에서 승리하여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 국경 경비


이처럼 대마도는 대한해협을 끼고 국경에 위치한 섬이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 쓰였습니다.
지금 역시 해안에는 국경 경비대(자위대)가 위치해있고요, 훈련 중인 자위대원도 가끔 마주칠 수 있었어요.








- 대마도 한국전망대


날씨가 맑은 날엔 부산 앞바다가 보인다는 대마도 한국전망대. 무궁화가 처연히 느껴지는 것은 괜한 제 감상 탓이겠지요? :)
비록 제가 간 날은 날씨가 흐려 부산이 보이지 않았지만 부산을 향해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고,
이 곳에서 고국을 그리워한 동포들의 마음도 헤아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처럼 대마도에 남겨진 교류, 일제, 전쟁과 같은 여러 역사의 흔적들을 둘러보면서,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사실에서부터 새롭게 알게 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스토리를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감상과 결론은 모두 각자의 몫이겠지요. 저 역시 저만의 대마도를 품고 돌아온 듯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뜻깊은 대마도가 되길 바라며! :)

다음엔 입이 딱 벌어지는 대마도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매력을 소개하는 포스트 가지고 올게요!



대마도 여행,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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